<부산지명총람>(부산시)에서 찾은 자료입니다.
정리하면
명지 - 바닷바람소리, 갈대밭 바람소리가 우는 듯 들리는 동네 신호 - 새로 생긴 섬
정도가 되겠네요. '신도'가 '신호'로 바뀌면서 '섬 도'가 왜 '호수 호'자로 바뀌었는지는 설명이 없네요.
명지와 신호 지명 유래
명지동 낙동강 하구 삼각주의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는 명지도(鳴旨島)가 바로 명지동((鳴旨洞)이다. 명지동에는 사람이 산 역사는 그리 오래 되지 않다. 이에 관한 문헌기록은 물론 없다. 명지동의 전역을 조사하여 보아도 조선시대 이전의 유물은 발견되지 않는다. 문헌상으로 중종 25년(1530)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김해도호부 산천조에 명지도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에 의하면, 이 섬은 ‘김해부의 남쪽 40리 지점에 있으며 동쪽으로는 취도와 200보쯤 떨어져 있고 섬의 둘레가 17리다’라고 하였다. 이 섬을 명지도라고 부르게 된 유래에 대하여는 ‘큰 비가 오려든지 큰 가뭄이 오려든지 큰 바람이 불려 하면 반드시 우는데 그 소리가 어떤 때는 천둥소리, 북소리 혹은 종소리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 섬에서 들어보면 그 소리가 멀어져서 들려오는 것 같으나 어디에서 울려오는지는 알 수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만 해도 명지도는 상당히 큰 섬이었음을 알 수 있다. 명지도의 다른 한 이름은 명호(鳴湖)이다. 이 곳의 주민들은 현재도 명지보다는 명호라고 부르는 사람이 더욱 많은 것 같으며 나이가 많을수록 명호라는 지명을 더욱 많이 사용한다. 명지도는 농지로 사용되기 전에는 온 섬이 갈대밭이었을 것이다. 한때 명지가 발전되기 이전에는 농토가 아닌 곳에는 온통 갈대가 무성하였던 곳이다. 바닷바람 소리와 해변에 가까운 갈대섬의 바람소리가 울리는 소리를 이런 어귀(語句)로 전하고 또 기록했을 것이다.
신호동 신호동(新湖洞)은 바닷가운데 새로 생긴 섬이라 하여 신도(新島)라 했고 명지면 신전리(新田里)에 속해 있다가 1914년 신호리로 되었다. 광복 전후까지 이 곳은 염전으로 유명했고, 마을 앞 바닷가에는 해송이 일렬로 늘어져 있어 아름다운 풍광을 유지하였으나 요즈음은 신호공단의 개발로 그때의 자연스런 분위기는 사라지고 없다.
- 신도(新島) 옛날 신호동 일대에 형성돼 있던 하중도(河中島). 명지섬에 이어 바다 가운데 새로 생긴 섬이라 하여 신도라 부르게 되었다. 광복 전후까지 소금밭으로 유명했고 앞바닷가에는 해송이 일렬로 늘어서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1967년 간척공사로 주로 파를 재배하는 경작지로 변하였고,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지방공단으로 조성, 옛모습이 공업지대로 바뀌고 있다.
- 진우도 신호의 앞 바다에 동서로 길게 뻗어있는 모래톱. 면적 658㎡인 유인도이다. 1912년 이전에 생겨난 모래톱으로 왜선동(倭船嶝) 또는 이점등으로 불렸으나 1956년 이곳에 진우원(眞友園)이라는 고아원이 세워지면서 ‘진우도’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진우원은 1959년 사라호 태풍 때 큰 피해를 입으면서 육지로 철수해 버렸다.
- 신호 마을 남해안에 면해 있는 마을이다. 진우도와 마주보고 있다. 바다 한가운데 새로 생긴 새섬(新島)이라 불렸다. 명지면 신전리(新田里)에 속해 있다가 1914년 신호리(新湖里)가 되었다. <조선의 성>(조선총독부,1934)에 의하면, 당시 신호리, 평성리에는 32세대의 김해 김씨 동성마을이 있었다. 1965-1967년의 녹산간척공사로 사암(四岩)에서의 뱃길이 없어지고 육지와 이어져 섬의 모습을 잃게 되었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마을 앞에서 제염엽이 성행하였다. 신호지방산업단지 조성. 신호초등학교가 있다. 마을 가운데 약 200년 된 포구나무가 마을의 안녕을 지키는 당산나무로 서 있다. 매년 정초에 풍어제를 지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