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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한 정보/생태이슈

아! 소!

제 목 :   아! 소!  조회수 :   8
작성자 :   :  홍정욱 작성일 :  :   2008.05. 14.
 
 

소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밤낮 없이 온 세상이 소란하다.


값싸고 질 좋은 고기를 잘 사왔다고 쬐려보며 우기는 이가 있는가 하면, 죽어도 못 먹겠다고 촛불 들고 나선 이들도 있다.


바라보고 있으면 여러 가지 생각이 오간다.

쇠고기는 소가 될 수 없지만 소는 쇠고기가 되는 것은 분명하니 촌에서 큰 반편에겐 소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이 엇갈릴 수밖에 없다.

   

배운 게 쟁기질이고 삽질인 땅벌레의 자식이라 소의 꼬리를 따라 다니며 컸다.

어떤 이가 소의 부위별로 다른 맛을 구분할 수 있다면 나는 적어도 살아있는 소의 신체 각 부분에 얽힌 각각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다. 잠시만 눈 감으면.


송아지 머리에 솟던 말캉한 뿔과 어미 소의 갈라진 뿔!

콧등에 송알송알 맺힌 땀방울, 혓바닥의 깔끄름함, 트림의 냄새.

귓바퀴 부채의 바람 냄새, 그 터럭의 부드러운 날림.

목구멍으로 풀 넘어가는 소리, 뱃속에 물이 흐르는 소리.

풀을 뜯을 때 위 입술의 우물거림, 아랫니의 가지런함,

벌레를 씹고 혀로 겨워 내며 주억거리던 절구질, 되새김질 소리,

발에 밟혀본 아찔한 묵직함, 그 갚음으로 밟아본 비스듬한 딱딱함,

방귀소리, 쇠똥이 나오기 전과 후에 오물거리던 똥구멍,

오줌 줄기의 따뜻함, 쇠똥이 썩어가는 냄새, 쇠똥구리의 굴, 손바닥에서 굴을 파던 쇠똥구리의 입질, 발길질.

잔등에 올라탔을 때 불룩거리는 근육의 꿈틀거림, 꼬리채에 뺨 맞아 본 얼얼함. 

 

송아지 찾는 울음과 발정 나서 우는 울음을 분명히 구분 할 수 있고 잘 먹는 풀과 먹으면 안 되는 풀도 대강은 구분 할 수 있다.


어쩔 수 없어 소를 팔 때는 한 이틀은 부드러운 죽을 먹여 보냈는데...

더 어쩔 수 없어 소를 잡을 때는 간단하나마 감사의 祭儀를 올리기도 했는데...


그러나 이따위 것들 기억하고 있으면 뭘 하나?

소가, 소가 아닌 것을!


대보름이면 사람보다 먼저 밥을 챙겨 먹이던, 식구 같은 그런 소는 없다.

제 살을 갈아 먹이고 철망에 가두어 둔, 굵은 눈알을 불안한 듯 굴리거나 도륙당해 벌겋게 매달린 고깃덩어리인, 더 이상 가축이 아니라 換金을 위한 재물이고, 생명의 몸집이 아니라, 식육의 덩어리가 되어버린 그런 쇠고기를 더 많이 본다.


식용을 목적으로 길러지는 소는 제대로 자라는 생명이 아니다.

한 사람 몫의 고기를 생산하기 위해서 열 댓 명이 먹고 살 몫의 곡식과 물을 먹어 없애야 하는 비효율적인 생산물일 뿐이다. 땅 위의 모든 사람이 미국인들처럼 육식을 주식으로 하기 위해서는 경작지로 이용할 땅이 지구 같은 별이 대 여섯 개는 되어야 한다. 그러니 빨리 키워내기 위해 이른바 ‘육식사료’를 먹여 키워 내는 참으로 패악스런 짓거리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제 살점을 먹여 살찌우는!


인간이 추구하는 생산의 효율성이란 짓거리가 이제 이러한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어디 소만 그럴까!

골골이 다른 문화는?

언어는?

철학은?

이것이 돈으로 덮어가는 음흠한 세계화의 본질임을!

 

풀을 먹던 밥통에 제 살을 억지로 삼키고 자랐으니 소가 어찌 성할까?

그런 소를 먹고 살면 우리는 성할까?


잘 시간 아껴가며 제 먹을 것에 대해서 할 말을 하는 아이들을 보면 몇 살 더 먹은 치로서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 숨길 수 없다. 물도, 바람도, 고기도 상한 걸 먹여야 하다니!


물아! 바람아! 소야! 아이들아! 미안하고 미안하다.

 

내남 없이 육식을 탐하는 혀를 배워서인지 오렌지를 어린 쥐로 만들어가는 세월이지만 목숨 버려 몸 바친 牛公祭位에 이런 弔辭쯤은 올릴 수 있겠지.




<이나라 강산을 사랑V 하시는

식용의 큰별V 께서 고히 잠드소서> 니미럴!